[이 아침에] 시 같은 말
“아, 광합성 충전하시는군요.” 회사 점심 자투리 시간에, 볕 좋은 현관 앞 난간에 기대 서 있는 나를 보고 젊은 직원들이 말했다. 볕 쬐기를 우리는 일광욕이라 하는데 요즈음은 광합성 충전이라고 말하나 보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은 정말 기지가 넘친다. 또 준말이 넘쳐나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얼죽아’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고, ‘생선’은 생일 선물이라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준말은 유행을 타는 한때의 슬랭도 아닌 것 같다. SNS 시대의 흐름 따라 말의 표현도 디지털화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겠거니 관망하려 하지만 아무래도 말의 의미가 훼손된 것 같아 마뜩잖다. 준말이 표현의 자유라 해도, 자유에는 책임 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고리타분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더 빠르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게 당연한 흐름이라 해도, 우리 삶의 기본인 말의 품위는 지켜져야 한다. 이런 생각은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꼰대의 외곬 고집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별수 없다. 준말이 일상화된 신세대 화법을 따라 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고수할밖에. ‘고전(classic)이 왜 고전이랴? 구식과는 차별되는 것으로 지켜내고 싶은, 언제까지나 좋은 것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라는 글이 떠오르며 준말의 대세가 비단 나 혼자만의 우려가 아닌듯하여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말은 곧 인격의 표현이자 그 시대 사회 풍조를 나타낸다. 우리 문화는 가까운 사이라도 적절한 예의를 갖춰 말하는 예절을 중시했다. 말의 절도가 미치는 품격이 삶의 품격으로 이어진다는 것의 가르침이다. 막내가 청소년기 때의 일이다. 아들에게 별스럽지 않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돌아온 대답이 불손한 듯해 당황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엄마에게 그런 언사를 쓸 수 있느냐며 다그쳤다. 그런데 엄마가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했다는 아들의 대답은 참담한 충격이 되어 엄마로서 나의 언사를 돌아보게 했다. 그날을 계기로 아들에게 하는 말은 외마디 외침조차 다듬으려 노력했다.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된 아들이 얼마 전 “엄마가 하는 말은 모두 시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뜻밖의 예찬에 내가 제대로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너무 감동을 주는 칭찬이었다. 엄마로서의 인생 전반에 대한 귀한 찬사가 아니겠는가. 엄마 말을 시로 듣는 우리 아들이야말로 시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마침 석양이 장관을 이룬 하늘을 보며 아들은 “노을 낀 하늘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 아들이 갑자기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엉겁결에 당장 시야에 들어온 하늘을 가리켜 ‘노을 낀 하늘’이라 가르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형용구의 서정적 느낌이 한국말 초보인 아들에게 제대로 전달 될까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아들은 오래전 배운 어구를 이렇듯 멋지게 적용한 것이다. 아마도 그 말과 함께 그때의 풍경과 정취까지 아들 기억에 아름답게 간직되었나 보다. 한마디 고운 말이 심겨져 고운 말의 꽃을 피운다. 보라!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다운 말을 품고 있다. 아름답게 꽃피우는 일은 우리 몫이다. 이영신 / 수필가이 아침에 오래전 아들 아들 기억 우리 아들